2007년 03월 11일
[피버 피치] 고개 떨구지 마 우린 피눈물 흘린다
피버 피치닉 혼비 지음, 이나경 옮김/문학사상사 |
| 인천 유나이티드가 돌풍을 일으키던 해, 그들의 모습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가 있다. <비상>이라 이름붙은 이 영화는 프로축구팀을 소재로 만들어졌지만 축구 영화는 아니다. 아무리 축구를 소재로 영화를 만들었다 하더라도, 소재가 축구였을 뿐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도 축구인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영화는 축구를 하는 선수들과 그들의 가족, 코칭 스텝, 구단 프론트, 그리고 그들을 응원하는 축구팬들의 모습을 번갈아 보여준다. 결국 이 영화가 담아낸 것은 축구가 아니다. 사람들이다. 가까운 이가 나에게 전화를 한다. 이번 토요일에 저녁이나 한끼 먹자고. 난 이렇게 대답한다. 잠시만 기다려봐. 그러고선 주말의 시합 일정을 확인해본다. 이번 주말이 원정경기였던가? 홈경기라면 얘기는 거기서 끝이다. 만약 원정경기라면 TV중계가 있는지를 마저 확인한다. 만약 TV중계가 있다면 전화를 건 이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날 저녁엔 약속을 잡을 수 없다. 내 주위의 사람들은 아직도 여전히 내가 축구를 좋아한다는 걸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K리그를 좋아하는 걸 이해할 수가 없다. 이렇게 된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내가 거의 30년이 넘도록 축구와는 담을 쌓아온 사람이라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그들이 K리그는 재미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원래 난 월드컵 때에도 축구를 거의 보지 않던 사람이었다. 비슷하게 축구엔 별 관심이 없던 친구들도 한일전은 챙겨 봤으나, 난 그마저도 관심이 없었다. 어느 날엔 친구들과 모여 술을 한 잔 하다가 '어제 했던 한일전' 얘기가 나온 적이 있다. 나는 무심하게 '안 봤다'고 했고, 내 말을 들은 친구들은 3.1만세 때 집 안에 틀어박혀 숨어있던 놈을 발견한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그러던 내가 왜 축구 때문에, 그것도 많은 이들이 재미없다고 믿는 K리그 때문에 주말 약속을 잡지 않게 되었을까. 2002 월드컵의 영향? 축구에 빠져든 계기는 사실 단순하다. 우연히도 다니던 회사에서 위닝 일레븐이라는 축구 게임을 하게 됐고, 우연히 회사를 그만둬 시간이 많아졌다. 마침 한중일 프로축구 챔피언들이 참가하는 'A3대회'가 열리고 있었고, 마침 시간이 많아진 터라 그걸 보게 됐다. 하지만 왜 내가 그 때부터 축구 경기를 챙겨보게 됐는지는 나도 정확히 모른다. 물론 위닝 일레븐이 아주 재미있는 게임이었기 때문에 축구에 대한 관심이 조금씩 커지는 계기가 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그저 딱히 무엇 때문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에 이끌려 매주 축구장을 찾기 시작한 것이 지금에까지 이르렀다. 무언가를 좋아하게 되는 과정은 사실 대개 이런 식이다. 딱 꼬집어 한 가지 이유가 있어서 어떤 여자와 사랑에 빠지는 남자는 흔치 않다. 마치 보이지 않는 끈이 서로를 잡아당기는 것처럼 그에게 끌리게 되는거지. 축구에 빠진 사람에게도 이런 공통점이 있다. 보이지 않는 끈. 이 끈이 내 몸과 축구를 단단히 연결하고 있는데 다만 끈이 팽팽한 정도는 사람마다, 때마다 조금씩 다르다. 대개 주중엔 느슨해져 있다가 주말이 가까와지면 팽팽하게 당겨지는 경우가 많다. 아드레날린이 상승하고, 입이 조금씩 마르며, 머리 속에선 양팀 서포터들의 함성이 먼 산 메아리처럼 들린다. 저자 닉 혼비는 영국 프로축구리그 중 하나인 프리미어리그의 명문팀 아스날의 팬이다. 최근 여러 한국인 선수가 진출한 덕에 많은 이들이 프리미어리그에 대한 지식의 폭을 넓혀가는 중이라 굳이 내가 설명하지 않아도 대략 분위기는 알고 있을거다. 영국인들은 한 명당 하나의 팀을 갖고 있으며, 대개의 경우 이 팀은 평생 바뀌지 않는다. 앞의 문장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표현은 '갖고 있다'는 말이다. 영국인들은 모두 구단주인가? 축구와 축구팬을 잇는 끈이 계속 유지되게 만드는 요소 중 가장 큰 것은 '소속감'이다. 영화와 영화광을 잇는 가장 큰 요소는 '재미'일지 몰라도, 축구와 축구팬을 잇는 것의 핵심은 재미가 아니라 '소속감'이다. 말도 안된다고? '축구단에서 일하는 직원도 아닌데 소속감은 무슨' 할지도 모르지만, 믿어라.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죽었다 깨어나도 축구팬을 이해할 수 없다. 저자 닉 혼비는 도대체 어떤 이유로, 어떤 방식으로 자신이 아스날의 팬이 되었는가를 설명한다. 정확히는 '설명하려고 애쓴다'. 이건 또 무슨 얘기야? 간단히 얘기해보자. 박영석이라는 사람이 있다. 등반가로 유명한 사람인데, 툭하면 에레레스트네, 히말라야네, 남극이네 하고 돌아댕기는 사람이다. 에베레스트가 무슨 동네 약수터도 아닌데 툭하면 올라간단다. 동상에 걸리고, 동료를 산에서 잃고, 죽음의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겨가면서도 그 짓을 그만두지 못한다. 이거야 무슨 '절대로 끊을 수 없는 끈'이 연결되어 있다고밖에는 설명할 수가 없는 일이다. 달리 설명할 방법이 있나? 난 절대로 이 양반을 이해할 수 없다. 무엇 때문에 목숨을 걸고 그 일을 하는지. 닉 혼비가 하는 얘기도 마찬가지다. 그는 부단히도 '축구팬'이라는 사람들에 대해 설명하려하지만, 그게 쉽지가 않다. 가족 모임도, 중요한 행사도, 축구 앞에선 무용지물, 똥친 막대기가 되어버리는 인생.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그러면, 평소 축구를 잘 보지 않는 사람들은 정말로 이것을 이해할 수 없을까? 꼭 그렇지도 않다. 멀리 볼 것도 없이 5년 전, 온 나라를 붉게 물들였던 그 순간을 떠올려보자. 안정환이 패널티 라인 앞에서 솟아 올라 머리를 절묘한 방향으로 움직여 공의 각도를 꺾어놓던 그 순간, 거함 이탈리아를 격침시키던 바로 그 순간.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뜨거운 기운, 무언가 걸쭉한 액체처럼, 단단한 불덩어리처럼 솓구치더니, 온 몸의 혈관을 타고 흘러 밖으로 뿜어내는 듯한 황홀감. 그 설명할 수도, 말할 수도 없는 느낌을 당신은 느꼈었나? 도대체 왜 그것을 느끼는 건가? 그것이 축구팬의 심장을 관통하는 한 가지 이유다. 그 순간 안정환은 나고, 내가 안정환이며, 저 푸른 잔디를 질주하는 것은 나의 또다른 분신이 된다. 나와 팀은 다른 개체가 아니며, 나와 그는 한 몸이 되는 그 순간. 그것을 한 마디로 압축해 '소속감'이라 한다. 그리하여 축구팀은 니 팀도, 우리 팀도 아닌 '내 팀'이 된다. '12번째 선수'라는 표현이 있다. 바로 축구팬을 지칭하는 말이다. '팬'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선수'라고 하는 이유는 뭘까? 인천 유나이티드의 팬들은 인천 유나이티드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 인천 유나이티드의 선수다. 경기장에 나서지는 않지만, 선수들과 함께 뛰는 열 두번째 선수. 그들은 선수와 같이 골을 넣고, 패스를 하고, 환호성을 지른다. '고개 떨구지 마 우린 피눈물 흘린다'는 인천 유나이티드의 팬들이 붙인 걸개에 쓰여 있는 말이다. 경기에서 패배한 선수들은 팬들 앞으로 걸어오며 고개를 푹 숙인다. 분하고 죄송하다. 이 순간 만큼은 팬들은 열 두번째 선수에서 빠진다. 오히려 부모의 마음에 가까울거다. 경기에 패한 아들의 모습을 보는 부모는, 눈물 흘리는 자식을 보는 부모의 마음은 찢어진다. 글을 마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나만 덧붙이고자 한다. 내 팀을 갖는 것은 축구팬이 축구선수로 거듭나는 과정이다. 그런데, 이 대명제가 실현되지 못하는 나라가 있다. 내 조국, 이 나라, 대한민국이다. 어느날 아침이 되니 내 팀이 없어져버리는 곳이 바로 대한민국의 프로축구리그, K리그다. 이런 일이 번번이 일어나는 건 축구팀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이 축구팬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단 한 번도 내 팀을 응원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축구팬의 마음을 알 수가 없다. 그들의 눈에 우리는 영원히 축구팬일 뿐, '12번째 선수'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아, 한 가지만 더. 인천 유나이티드 얘기를 했지만, 내 팀은 따로 있다. |
# by | 2007/03/11 00:48 | 마음속 땅 한 평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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